■ 기조연설
@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노벨평화상 수상자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가 잘 알다시피 그 어떤 기조연설이나 또 어떤 세션이나 이렇게 오찬 이후에 할 때에는, 특히 이렇게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고 난 다음에는, 저랑 제 아내도 채식주의자이고 저희 동료 분들, 마이크님께서도 글루텐프리를 하시는데 오늘 점심식사는 꽤나 풍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께서 오후 세션에 잘 경청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먼저 오전에 저희가 여러 연사분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 제가 생각했던 것은, 오늘의 행사가 단지 포럼만은 아니고 글로벌 책임, 글로벌 평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포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 행사를 통해서 저희는 한국의 현대화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축배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복력, 그리고 평화를 논하고 있습니다. 추진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추진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축배를 들고 있는 장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과 그분의 여러 모습들을 기리면서 축배를 들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구적 책임과 지구적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분을 기억을 하고 있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무엇보다 감사의 말씀, 그리고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조직위원장님 그리고 모든 행사 주최측 여러분, 주관기관 여러분, 김대중 평화재단 여러분, 그리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아내 그리고 저의 동료는 저희가 한 30여시간을 비행을 하고 어제 밤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저희가 조금 여유롭게 일어났습니다. 시차도 있었죠. 그런데 오늘 오전에 연사분들께서 말씀하신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 들으면서 저는 생각했고, 에너지를 얻었고,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저희가 들은 것처럼 지금 많은 도전 과제에 직면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많은 이슈들이 있습니다. 또 서로 상충되는 이해관계들이 있습니다. 우선순위,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하나의 주문을 외우면서 말씀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 주문은 저희 인도 사람들이 믿는 주문입니다. 지혜와 지식에 대한 신성한 주문입니다. 이미 고대시대 때부터 내려오고 있는 주문입니다. 간단한 주문이지만 그 힘은 막강합니다.
‘Sangachadwam Samvadadwam Samvomanansi Janatam, Deva Bhagam Yathapurve Sanjananam Upaasate’.
오늘날, 이곳에서 저희는 3~4가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이 곳은 저희가 함께 걷고자 결단을 하는 자리입니다. 저희가 함께 걸어서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결단을 해야할 것입니다. 다 저희의 형제 자매입니다. 함께 걸어야합니다. 그러면서 동등한 경쟁의 장을 만들어야합니다. 모두가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하고 그 기회는 공평해야하며 공평한 경쟁의 장이 만들어져야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메세지 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걷자고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이런 도덕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고는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소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두번째 메세지는 저희가 함께 이야기, 소통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소통을 해야합니다. 통일의 언어로, 사랑의 언어로 소통을 해야합니다. 저희가 소통을 해야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 많은 자유를 허락해야하며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힘이 주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합니다. 사람들이 소통을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조성해야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아무리 사회적으로 약한 자라도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서로 공감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서로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정을 나눠야합니다. 오늘 아침에 한 기자분께서 저에게 물어보시기를 "한국의 젊은 분들은 열정적이고 한국은 많은 발전을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젊은 세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젊은 분들이 많이 외로움을 느끼시는데요. 왜그럴까요?"라고 저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드리기를 "저희가 함께 걷는다면, 그러면 저희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친구가 될 수 있는 방법,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이 신뢰는 저희가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러한 신뢰가 구축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을 드렸습니다.
성장이라는 것은 절대로 혼자 일어날 수 없습니다. 평화에는 책임감이 따르고 연결성이 뒷받침 되어야하고 협업이 있어야합니다. 협력이 이뤄져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질적인 성장은 하지만 사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사회뿐만 아니라 지구, 오늘날 우리가 지구에서 목도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요소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찾아서 사람들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어야합니다. 어떨 때는 화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서 평화를 구축할 수가 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학교로부터, 공동체로부터, 학교로부터 또 국제 단위로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세번째 메세지는 저희의 지식과 마음을 함께 모으자는 것입니다. 저희의 생각들은 여러 이견들에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저희 의견들은 다를 수 있지만 물론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통된 부분을 잡아야되는 것입니다. 공통된 부분은 저희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누리는 공통점은 저희가 글로벌 하게 상호로 연결되는 것뿐만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야합니다. 현실입니다. 저희는 인간으로서 진화는 그렇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전혀 상호의존적이고 상호 연결이 된 존재라는 것은 새로운 소식이 아닙니다. 부족이 있었을 때부터, 그리고 마을, 공동체가 형성이 되고 또 도시가 또 국가가 만들어질 때도 그러한 개념은 있어왔습니다. 그러한 요소는 항상 있어왔던 것입니다. 진화론적인 사회학자들은 또는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요소를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수백만년동안에 있어왔던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늘 느껴왔던 것이죠.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하는구나'라는 것을 느껴왔습니다. 저희는 희생을 해야합니다. 희생을 통해서 협력을 해야됩니다. 그것이 책임감에 깔려있는 개념입니다.
저는 학자가 아닙니다. 어제 저는 '국제 뉴스 서밋'이라는 다양한 국가에서 약 700명의 젊은이들이 참가한 대회에 참가했다가 왔습니다. 어제 그 회의에 참석하면서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한 학생이 이야기를 하기를 "오, 저희는 지식이 많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 십 년동안 우리는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제들을 피부로 느끼고 있을까요? 그러한 해결책들이 진짜 맞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은 이렇게 많은 리더들과 학자들과 전문가들과 리더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 자리에서 그 질문은 듣고 계셨어요. 사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한 문제입니다. "정말 피부로 그것을 느끼십니까?" 저희가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항상합니다. 그러한 문제들이 또 가속화되고 있고 더 복잡해지고 있고 더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는 이와 관련한 이야기들은 많이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질문은 "정말 그 문제를 피부로 느끼십니까?"
지구적인 책임이라는 것은 지정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솔루션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책임은 3단계 세 가지 차원에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저희의 감정,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저희가 책임감을 느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책임입니다. 두번째는 윤리적인, 도덕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과 윤리는 계속 바뀝니다. 절대 바뀌지 않는 개념이 아닙니다. 사회가 달라질수록 여러 모델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개념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임감 자체는 윤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저희가 어떤 도덕적인 이유나 윤리적인 이유로 책임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법이 있고 헌법이 있으면 책임감이 있는겁니다. 왜냐하면 법과 헌법이 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선생님이 있으면 학교에서 선생님은 가르쳐야하는 겁니다. 직장인은 일을 해야하는 겁니다. 의사는 의사의 일을 해야하는 거고, 할 수도 있고 그런 것이지만 어째든 책임의 범주에 있습니다. 국가에서 주는 책임인거죠. 헌법에 명시된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책임감의 문화를 어떻게 조성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합니다. 특히 평화의 맥락에서 생각을 해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평화는 사실 단지 전쟁이나 폭력이 없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라는 것은 균형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수백년동안 수천년동안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또 기록해왔습니다. 또 신체와 마음과 영혼의 균형을 이루어야합니다. 내적인 것이죠. 또 외적인 것으로는 개인과 그리고 그 주변환경이 균형을 이루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과 지금, 수자원, 산, 공기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웃과도 균형을 이루어야겠습니다. 정부와 여러분의 다른 종교와 아니면 국제적인 차원으로까지 이러한 균형이 이뤄져야합니다. 그래서 사회, 지구와 함께 개인들은 균형을 이루어야하고 이러한 균형상태는 유지가 되어야합니다. 정의와 형평성, 동등함이 유지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정의가 없다면 평등이 없다면 그러면 가족에서 사회에서 글로벌 차원에서도 평화는 없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지난 20~30년동안 150여개국에서 있는 아동 노동을 하는 아이들을 많이 만나왔습니다. 책임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에는 많은 사건들이 떠오릅니다. 한번은 제가 서부아프리카에 갔었습니다. 코코아빈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죠. 여러분, 초콜렛을 많이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또 초콜렛을 선물로도 많이 주시기도 하십니다. '맞습니다'라고 제 오랜 동료분도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네요. 초콜렛을 배우자나 아내분한테, 여자친구, 남자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에게 발렌타인데이에 선물도 해주고 또 생일 선물로도 줍니다.
이렇게 코코아빈을 생산하는 그 서부아프리카에 가서 13~15살쯤 되는 많은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아이들 모두가 코코아빈을 생산하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여러 흉터, 상처, 멍이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제가 한 여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초콜렛 좋아하니?" 그랬더니 그 아이가 다른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초콜렛이 뭐야?", 저는 그래서 '언어의 문제인가? 초콜렛이 뭔지 모르니? 굉장히 단 캔디 같은 것이란다'라고 설명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끼리 서로 "초콜렛이 뭐야"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떤 아이도 초콜렛을 보지도 맛보지도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그 코코아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코코아빈을 채취를 하고 있었음에도 먹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수 십 억 달러가 초콜렛을 통해서 벌어지지만 그 초콜렛은 아이들의 자유를 빼앗은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그 아이들의 존엄성, 미래, 꿈을 빼앗은 채로 코코아빈은 생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오늘 지구적인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누구의 아이들입니까?
저는 또 한 어린 여자아이를 저희 이웃국인 파키스탄에서 만났습니다. 7~8살 정도되었던 것같습니다. 그 여자아이는 축구공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축구팬들이 많죠? 그 여자아이는 그 축구공을 꼬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축구공을 꼬매는 작업을 할 때 마다 수차례 바늘이 잘못 꽂혔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피가 가끔 떨어졌습니다. 아이는 그러면 그 피를 쓱 빨고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 여자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아이야. 이 공장에서 더 일하지 않고 다른 기회를 주고 싶은데 너의 꿈은 무엇이니?"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여자아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도어와 파키스탄어는 사실 같기 때문에 그 아이가 이해를 못했던 것도 아니었었습니다. 그 아이가 저한테 말하기를 "꿈은 무엇인가요? 꿈의 뜻은 무엇인가요?"라고 하더군요. 저는 물어봤죠. "그럼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라고도 물어봤는데 그 누구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본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재차 물어보자 아이는 "나중에 가능하다면 제가 실제 축구공을 차보고 싶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것만이 그 아이의 꿈이었습니다. 제가 여러 번 재차 물어보고 나서야 '가능하다면 축구공을 한번쯤 차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근본적인 문제는 저희가 이 문제들을 피부로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족으로 또 인간으로써 인류로 연결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 번은 친구랑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친구는 우크라이나에서 작년에 돌아왔습니다. 그 친구가 저에게 하나의 동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8~13살 정도의 많은 아이들이 작은 철도가 지나다니는 어두운 터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엄마들은 그 아이들의 입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울지마"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터널 밖으로 군인들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밖에서는 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터널 안에 있는 엄마들은 아이들이 울지 못하게 입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도 그곳에서 연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현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저희가 이야기하는 것과 저희가 생각하는 것의 괴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느끼고 있는 것, 저희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것, 저희의 말과 행동이 언행일치가 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UN의 17명의 에드보켓으로 선임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슈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윤리적인 책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윤리적인 나침반이 없는 것이다"라고 저는 강조를 해왔습니다.
사실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보고서로 옮기는 작업은 쉽습니다. 선언문을 만들고 보고서를 만들고 법을 만드는 것은 쉽습니다. 어젠다를 만들고 그런 것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하지만 몸에 멍투성이인 사람, 이렇게 노동아동들을 만나보며 목도한 부분이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겸손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간디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도의 첫 번째 총리에게 "정책을 이반할 때 있어서, 어떤 계획을 짤 때 있어서, 텔레스마를 주어야한다"고 간디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텔레스마"라는 것은 바로 '그 사회의 가장 약자를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만들고 있는 이 정책이나 법이 그리고 계획이 약자에게 그 아이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정책은 법은 쓸모가 없다. 폐기하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의 나침반을 제시를 해준 겁니다. 그러나 많은 리더들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두 가지를 결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이 두 가지 축, 지구적인 책임과 평화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런 것들은 럭셔리가 아니라 저희가 생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책임과 평화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인류로써 생존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뇌가 있고 저희는 사고가 있습니다. 저희는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하고 저희의 고통처럼 느끼면서 그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추진력을 느껴야합니다. 공감이라는 것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닙니다. 공감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변화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꼈을 때만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종교, 모든 개혁과 혁신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바로 공감이었습니다. 저희는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래서 전세계의 정부들과 어떻게 하면 이 공감이라는 개념을 더 확산시킬 수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합니다. 더 포용적인 더 민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야합니다. UN과 UN의 많은 국제기구들은 개혁이 되어야합니다. 더 포용적이 되어야합니다. 더 활성화되어야하고 더 현대화 되어야합니다. 더 강력한 힘을 가져야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저희가 이런 공감을 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530억이라는 추가적인 재원은 저임금 국가의 교육, 의료, 그리고 여러가지 보호를 할 수가 있습니다. 아동들에 대한 지원을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530억 달러라는 것은 전세계 군비의 약 9일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희의 마음으로도 저희의 생각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포용, 그리고 공감, 글로벌 전세계 정부들이 공감을 해야하고 책임감을 느껴야합니다. 그래야만 평화가 달성될 수 있습니다. 국가와 그리고 또 기업들이 이렇게 공감을 하는 리더들을 통해서 일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공감하는 힘은 기업을 도울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책임감을 이 전체적인 공급망에 주게 될 것입니다. 미국 기업들은, 또 유럽기업들에게도 죄송하지만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신의 국가에서는 아동들을 착취할 수 없지만 다른 아프리카나 그런 곳에서는 이러한 아동들이 11~15살 아이들이 자신의 공급망에서 일을 하게끔 허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품들이 최종적으로 유통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이중성인겁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사라져야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윤리적인 책임감을 가지는 문화를 조성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국제기구들의 국제 기업들에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합니다.
정글에서 큰 화재가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사자까지도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한 작은 새가 불구덩이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사자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 지금 뭐하는거니? 너 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있니?" 그러자 그 작은 새가 대답하기를 "저는 이 불을 끌 것입니다. 저는 이 불을 끌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 그 새가 말하기를 "사자님 제 부리를 보세요. 저는 제 부리에 물을 담고 있습니다. 물 한 방울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정글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이것을 좌시할 수는 없습니다." 사자는 놀랐지만 이 작은 한마리의 새는 계속 날았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형제 자매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 이자리에서 저희가 김대중 대통령님을 기억을 하고 또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윤리적인 책임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안에 있는 그 작은 새가 죽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여러분께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리고 정말 행동, 말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고 싶을 때, 단지 보고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도 그 작은 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한마리의 새가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쇼. 여러분 안에는 그 새가 있습니다. 여러분이야 말로 공감을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세계를 바꾸실 수 있고, 이 세계가 더 지속가능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 마이크 매기 미네르바 대학 총장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정말 멋진 연설을 강연을 들었습니다.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바라는 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말씀을 드리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주제가 전 지구적 평화잖아요. 인류가 바라는 목표이고, 사티아르티 선생님이 말씀해주셨던 것들, 특히 인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굉장히 영감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현대는 완전히 연결된 세계입니다. 하지만 분열도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피스메이커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대학총장으로서 특히나 이 필요성을 충족시켜야하는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피스메이커를 육성하는 것은 우리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미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과 여러기관들이 청년들을 위해서 관점, 세계관을 만들어주고, 야심을 만들어주고, 꿈을 만들어주고있습니다. 이런 기관들은 청년들의 마음을 만들어주고 세계 평화를 위한 기본 요소들을 구성해야 합니다. 다문화간 이해를 육성하고, 공감하고, 그래서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면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가치관과 꿈을 쫓으면서 차세대 리더가 되고 사상가가 되고 또 시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미네르바 대학은 이런 사명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기업가도 만들고 전세계적으로 현명한 지도자들을 배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커뮤니티로서 지속가능하고 평화적이고 더 공평한 세상을 위해서 노력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글로벌 시티즌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우리 세계의 기초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하는 일의 기초가 되는 인재를 육성하고있습니다. 학생들은 거의 100개국 이상에서 오고 있습니다. 재능이나 성격, 학력 뿐만 아니라 지위를 막론하고 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온 나라들은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과거에는 냉전을 겪었던 나라도 있고,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중국, 대만 등 갈등을 겪는 나라에서도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들도 있습니다. 서울과 베를린의 역사도 우리 커뮤니티에 고고히 흐르고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갈등 국면들이 팔레스타인, 리비아,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시리아, 미얀마 등 이런 나라에서도 현실은 가혹하지만 많은 학생들과 그 가족들이 우리 커뮤니티에 속해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이 현실을 추상화시키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책임은 사실을 보고 우리를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독특한 교육적 경험과 과정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중의 여러가지 것들은 다른 기관들이 모델로 삼을 수 있도록 하고 있고 그런 모델들을 활용해서 미래의 평화를 구축할 수 있도록 활용하게끔 또 돕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까요?
미네르바 대학에서 글로벌한 책임은 다양한 문화의 이해. 시민사회 활동의 교육, 글로벌 공동체와의 인접성 결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약 2백명 정도의 학생들이 한 해에 들어옵니다. 4년동안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학습을 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만, 런던, 서울, 베를린을 다닙니다. 이런 곳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경험하고 또 정치적인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으로써 서로 협력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위해서 협력하는 그런 기술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수학여행 차원의 경험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해외에 간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 나름이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티즌십에 대한 교육, 그리고 윤리적인 가치, 사회적 책임,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현재의 가장 복잡한 문제들을 바라보고 복합적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한다는 것을 학생들이 알고있습니다.
기후, 빈곤, 보건, 사회 불평등 이런 것들이 우리의 교실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입니다. 로컬 프로젝트를 통해서 학생들이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참여함으로써 로컬파트너들을 통해서 여러지식과 기술들을 전달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글로벌노출을 통해서 이러한 역량들을 더욱더 활성화 시킵니다. 문화적인 측면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다문화적인 이해와 공감력을 배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학생들의 출신의 여러 도시를 갑니다.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이라던지, 일터의 문화, 관습, 매너 이런 것들도 배웁니다. 그렇게 하면서 학생들은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광범위한 문화적인 차이에 대한 이해를 우리 학생의 커뮤니티에 실현하게 됩니다. 음식도 나누고 문화를 나누면서 고국에 돌아가서도 그런 활동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체화할 수 있게 됩니다. 쌈바도 하고 만두도 만듭니다.
친구들과 이런 경험들을 함께 이런 경험들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사람들의 기쁨 뿐만 아니라 슬픔을 같이 이해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나누고 춤을 추고 이웃 국가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듣고 전래이야기를 듣고 풍경을 보고 이 모든 차이점을 보는겁니다. 학생들이 이런 경험들을 반 친구들과 나누고, 또 공개적으로 다른 문화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계를 깊어지게 하고 무엇보다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서로 연결성이 있다는 것은 자라온 환경이 달라도 굉장히 깊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차이를 건너서 교류의 장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제가 학생들과 있을 때 늘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킹 1963년에 했던 말씀을 하셨던 것들이 생각이 납니다. 여기 카일리스 사티아르티 선생님도 계시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셨던 김대중 대통령을 기리는 자리이고 이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서로 상호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 운명의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인권운동, 인권의 사상도 거기서 탄생했습니다.
'급진적이다'라는 것은 공감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행동을 한다는 것에서 급진적인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호연결되었다는 마틴 루터킹의 가치관, 희생하고 더 밝은 미래를 위한 활동, 노력, 그리고 진실을 위한 활동. 이 모든 것들이 가치관의 기저를 형성하게 됩니다. 소속감, 연결, 상호이해, 이런 것들은 갈등없이 쉽게 오진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대학에서 양성해줘야 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학년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다른 얘기를 수용하고 서로 경청하는지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외부인을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대해 1학년 때 배우게 됩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학생들은 아주 민감한 토픽에 대한 논의도 할 수 있게됩니다. 다른 의견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문화적 관용성을 배양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학생들의 개인관계 뿐만 아니라 국제 외교에도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글로벌한 갈등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기술들을 더 강화할 수 있을까요? 이란, 덴마크, 브라질에서 온 학생들과 헌법 수업을 하고 한국, 우크라니아, 남아공에서 온 친구들과 기후변화를 이야기합니다. 학습은 자신들의 의견을 먼저 나누고, 문화적인, 경제적인 여러가지 환경 맥락에서 자유롭게 교류하는 과정에서 학습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가치는 이것입니다. 인접성, 근접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분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단기적으로는 갈등해결에 해결책이지만 장기적 평화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가까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일 일상에서 각기 다른 습관과 관습에 서로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살면서 상호존중, 상호이해, 오해를 풀 수 있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기회들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학을 보편적인 가치관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교실에서도 구현됩니다. 이러한 부분은 4년 내내 같이 학습하고 공부하면서 공공히 자리잡게 됩니다.
파키스탄에서 졸업생들을 만났습니다. 이 졸업생들은 인도 출신의 친구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공감을 한다는 것은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메일박스에서 김희순이라는 학생이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내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라벨을 붙여야 할 까요"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슬픔과 기쁨을 함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피스메이커가 일상적으로 해야하는 일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대학 교육기관들은 커리어 준비를 시켜줄 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티즌으로서의 교육도 제공해야합니다. 우리는 평화, 피스메이커를 양성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여서 신뢰할 수 있는 친구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리더십이라는 것이 공감에서 나온다, 대화에서 나온다, 이해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변화를 일으키고 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우리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합니다. 테니시 윌리엄스의 시를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평화와 갈등에 대한 것들 의지의 긍정적인 생각의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 서로 사랑해야하는 충동, 화가도 될 수 있고, 작가도 될 수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건물을 태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불길을 잡는건 사랑이어야 합니다.
평화는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강력한 그리고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양육의 형태로 이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이 순간에도 회복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양육된다는 것은 반복을 통해서 꽃피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용은 가장 생각하기 어려운 곳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교육기관들이 그러한 가장 어려운 곳에서 많이 생겨나는 이유를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축하해야 합니다. 의구심을 하기 보다는 공동의 존재로써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합니다. 이 교육기관들이 이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가르칠 수 없다면 도대체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